취미./독서노트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1)

Place-B 2022. 7. 2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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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9년과 2020년의 대한민국

  •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고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았으며 국민을 가난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국부(國父) 자처한 무능하고 이기적인 독재자가 통치하는 동안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말뿐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를 찬양할 자유만 있었고 비판할 자유는 없었다. 정부의 정책을 추종할 권리는 있었지만 대안을 제시할 권리는 없었다.
  • 1959년 1인당 GDP는 81달러였지만 2019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 2,115달러가 됐다.
  •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다. 고르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대한민국은 풍요롭지만 고르지 않은 민주국가로 변신했다.
  • 무엇이 대한민국에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른 것 같은 변화를 일으켰는가. 흔히 국민의 위대함이나 지도자의 리더십이라고 답하지만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남달리 위대한 국민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정말 위대한 국민이라면 나라를 빼앗기고 동족상잔의 내전을 벌이고 남의 원조를 받으며 살았을 리 없다. 권력자들이 특별히 대단했다고 주장할 근거 역시 희박하다. 이승만부터 문재인까지 저마다 좋아하는 대통령과 싫어하는 대통령이 있을 뿐, 위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회적 합의를 이룬 대통령은 아직 없다.
  • 나는 한국현대사를 만든 힘이 대중의 욕망(慾望, desire)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기적과 같은 변화’를 이뤄낸 동력은 대중이 개별·집단적으로 분출한 욕망이었다. 사람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안고 산다. 욕망은 행동을 일으키고 행동은 사회를 바꾼다.사람은 물질의 유혹에 끌린다. 헐벗고 배고플수록 더욱 그렇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존심을 굽히고 법을 어기거나 남을 해치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한다. 사랑·존중·연대·자아실현과 같은 욕구는 그다음 문제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거나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굶어 죽기 직전인 사람에게 ‘존중과 존경’, ‘자아실현’과 같은 것은 정신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훌륭한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긴 사람은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과 지식인이었다. 사회적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 천부적 인권, 자유, 평등, 연대와 같은 관념은 산업혁명으로 일찍이 없었던 부(富)를 축적한 서유럽에서 먼저 나타났다. 민주주의는 경제가 발전해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된 곳일수록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일수록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철학서를 많이 쓰고 읽는다.
  •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우리 국민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을,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 안보국가에서 출발해 발전국가와 민주국가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간 것은 인류 문명사의 보편적 ‘계통발생’이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호모사피엔스가 문명이 생긴 후 생물학적으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없다.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동일한 욕망을 품고 산다. 인간은 먼저 ‘생리적 욕망’을 충족하고 그다음에 고차원적인 욕망의 실현을 추구하며 인간 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 데서 출발해 안전·자유·존엄이라는 높은 차원의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 질서정연하게 분업과 협업을 하는 사회성 동물은 숱하게 많지만, 호모사피엔스는 다른 동물과 달리 목적의식을 품고 자기 자신과 사회질서를 바꿔간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탐구한다. 생각과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고민한다. 본능과 욕망을 없애거나 넘어서지는 못하지만 거기에 얽매인 노예는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며 본능의 독재를 뿌리칠 수 있다.
  • 1조 원이 넘는 재산으로도 충족하지 못한다면 물질에 대한 욕망은 무한하다고 하는 게 맞다. 먹고 마시고 좋은 곳에서 잠을 자려는 욕망을 다 충족한 후에야 더 차원 높은 욕망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생리적 욕망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는 할머니는 생리적 욕구나 안전에 대한 욕구를 다 충족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면서 자기 몸에 불을 붙였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도 그렇다. 목숨을 걸고 농장을 탈출해 도시로 달아났던 19세기 중반 미국의 흑인 노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욕망은 사회적 존경·자기 존중·존엄·정의·자유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여러 욕망 사이에 엄격한 위계는 없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해석하면 욕망의 위계 가설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한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3조는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였다.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다. 우리 헌법이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천명한 역사적 근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 건국일은 1919년 4월 11일, 정부 수립일은 1948년 8월 15일이 된다.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곧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 20세기에 새로 생긴 나라는 많으며, 어느 나라에 살든 사람의 욕망은 다 비슷하다. 그런데 왜 모든 신생국에서 대한민국과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환경과 능력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이 조성됐으며, 국민은 어느 나라보다 신속하게 개별·집단적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대한민국에는 도덕·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지배층이었던 조선의 왕가와 양반계급은 망국(亡國)과 함께 무너졌고, 3·1운동의 힘을 받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투사들은 왕조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우지도 겪지도 못한 상태에서 공화국의 주권자가 됐다. 해방공간의 권력이 미군정이었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헌법을 복사한 것이나 다름없는 제헌헌법을 채택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그런 헌법을 채택했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나라가 된 것은 아니지만 국민 누구나 국가에 대해 자유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만들어졌다는 게 중요하다. 제도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외부에서 어떤 제도가 ‘이식(移植)’되는 경우에는 거꾸로 제도가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광복 이후 세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배웠다. 4·19를 일으킨 주역이 고등학생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혁명을 한 적이 없었다. 봉건왕정을 지키려고 막아선 왕과 귀족의 목을 자르지도 않았다. 제헌헌법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갖춘 나라들이 지구촌의 주도권을 움켜쥔 20세기 문명사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신천지 대한민국의 권력은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 이승만 박사가 차지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줄을 대어 일본인이 두고 떠난 적산(敵産)을 불하받은 사람들이 신흥자본가로 등장했으며,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며 살았던 군인·경찰·판검사·교사·공무원이 권력기관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을 받고 해산당했다. 헌법이 현실을 지배하지 못하는 가운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과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다.
  • 자유와 존엄에 대한 열망은 1960년 4·19로 터져나왔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5·16으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부는 물질에 대한 욕망 충족을 부추김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개발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의 지도이념은 ‘반공’과 ‘잘살아보세’였고 국가 목표는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이었다. 전국이 공사장 먼지와 굴뚝 연기로 뒤덮였고 걸신(乞神)들린 부동산 투기 열풍이 온 나라를 달궜다. 거대한 소비재산업과 중화학공업이 출현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그라운드 제로’ 대한민국을 질주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그 탁류 위에서 위험천만한 래프팅을 했다.
  • 4·19는 자유에 대한 갈망의 단순한 표출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 욕구 충족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전면적 심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의 욕구를 포착하고 화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인권·정의·존엄·평화·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980년 봄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 욕망은 1987년6월 화산처럼 터져나왔다.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민주화세력의 집권, 산업화세력의 재집권,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세 번째 정권교체로 이어진 6월 민주항쟁 이후의 정치사는 두 갈래 욕망의 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거듭 확인해줬다.
  • 우리가 개별·집단적인 욕망 충족 방법을 신속하게 터득한 데는 뚜렷한 문화적 배경이 있다. 한국 국민은 세계에서 제일 가난했지만 강력한 역사·문화적 정체성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1,500여 년 동안 한반도에는 하나의 국가만 있었다. 한국전쟁은 후삼국시대 이후 1,000년 만에 처음 겪은 내전이었다. 우리 민족은 이민족이 침략했을 때 싸우지 않고 굴복한 적이 없으며, 외세를 몰아낼 기회가 왔는데 궐기하지 않은 때도 없었다. 수억의 중국 민중이 침묵하고 있을 때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3·1운동이라는 민중항쟁을 벌였다. 세계 역사를 다 보아도 우리 민족처럼 격렬하고 끈질기게 외부 침략자에 대항한 민족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우리는 또한 전통적으로 지식을 중시하고 지식인을 우대했다. 무신정권시대를 제외하면 언제나 지식인 집단이 국가를 운영했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물리적 힘과 물질적 자본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이 부와 권력의 원천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이미 와 있었던 1960년대 중반 산업화를 시작했다. 소비재 경공업으로 시작해 금속·철강·자동차·조선·화학 등 전통적 중화학공업을 거쳐 전자·반도체·정보통신 등 첨단산업까지 나아간 과정에서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은 큰 역할을 했다. 상이한 종교·문화·전통이 병존하는 사회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다. 대한민국 국민은 역사·문화·생물학적으로 매우 균질한 집단이었고 긴 세월 중앙집권 정치체제를 경험했다. 임진왜란 의병투쟁, 일제침략기의 국채보상운동, IMF 경제위기 때의 금모으기운동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었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물질적 자원을 동원하고 정신적 에너지를 결집하는 집단적 능력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자산이다.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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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19와 5.16

  •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토크빌의 말은 민주주의 국가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어떤 사회가 독재자의 발밑에 놓여 있다면 그 체제는 누구의 수준을 반영하는가? 독재자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 모두를 반영한다. 훌륭한 정부를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를 쟁취할 능력도 국민의 수준에 넣어야 마땅하다. 지금 나는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도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대한민국 국민은 민주주의를 세우고 누릴 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를 되찾은 1987년 이후 등장한 7명의 대통령과 그들이 이끈 정부가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였다는 것은 다툴 여지조차 없다.
  • 외국의 식민지였다가 자주권을 되찾은 신생국가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세울 수 있다. 첫째는 역사의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의 자주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야 했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위반했다면서 반민특위를 비난하고 활동을 방해했다. 결정적 장면은 1949년 1월 노덕술을 체포했을 때 펼쳐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의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김근태를 참혹하게 고문한 이근안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을 죽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형사들은 모두 노덕술의 후예였다고 보면 된다.
  •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어 산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독재가 공존했던 1980년대 한국사회 한복판에서 탄생한 주사파(主思派)는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의 산물이었다.
  • 민족사적 정통성이 의심스럽고 경제적 효율성이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정부는 국가의 정통성을 세우지 못한다. 역사의 대의명분을 바로잡고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려면 먼저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정부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4·19가 일어났다.
  • 4월 29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했고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국회는 내각제 개헌안을 처리하고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양원제 국회를 구성했으며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를 뽑아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이었다.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그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인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됐다. 자유당이 사라지자 정치의 중심은 민주당 구파(舊派)와 신파(新派)의 당내 노선투쟁과 권력다툼으로 옮아갔다. 장면 정부가 군사정변에 무너져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4·19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이 궐기해 권력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바꾼 혁명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4·19는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정통성 있는 국민국가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4·19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체득했다.
  •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3,500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의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항),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항).” ‘민생고 해결’ 공약은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겠지만 ‘병영복귀’는 거짓말이었다.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어야 했기에 순수한 애국심으로 거사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작 정치를 할 준비를 갖춘 다음,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헌법을 바꿔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박정희 장군은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6조를 폐기하고 1963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 간발의 득표율 차이로 제5대 대통령이 됐으며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더 큰 격차로 윤보선 후보를 이겼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걸어갔던 독재와 장기집권 경로를 답습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출마한 1971년 선거에서 금권·관권을 동원해 제7대 대통령이 됐다. 1972년 10월에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었으며 대통령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조르고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 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으로 뽑혔다.
  • 5·16을 4·19 위에 두는 견해가 완전히 터무니없다고 할 수는 없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이었지만 새로운 권력주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를 바꾸지 못했다. 그와 달리 5·16의 주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으로 대폭 늘어난 군대의 힘을 동원했다. 그때 대한민국에는 기술적 효율성과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군대조직의 힘에 맞설 만한 집단이 없었다. 박정희 장군은 그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운영에 필요한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군대를 동원해 그런 일을 하면 군사쿠데타라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뤘으니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었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 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한 역사 인물이 이처럼 극단적인 호오(好惡)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특성을 지니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행했기에 어떤 면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만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진심으로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박정희 정부는 18년의 집권 기간에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바꿨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고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가꿨으며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하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나는 이런 것이 ‘커다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크게 성공한 독재자였다.
  • 4·19와 5·16은 각자 나름의 성공을 거뒀지만 4·19가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데는 긴 세월이 걸렸다.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4·19의 정신을 받드는 정당이 처음으로 집권했다. 그 승리는 10년으로 막을 내렸지만 2017년 5월 두 번째 집권으로 이어졌다.
  • 5·16의 승리는 화려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통치와 후예인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의 14년 집권으로 끝이 났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33년을 맞았던 2012년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5·16의 부활이 아니라 짧은 ‘커튼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유죄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역사의 법정이 5·16을 단죄했다고 할 수는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전히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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