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3.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 한국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離陸, take-off)’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 특정한 가치판단이나 규범적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거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거나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가능했다”고 할 수는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추진해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 경제성장에 관한 한 독재·권위주의·보수 정권이 민주·자유주의·진보 정권보다 나았다는 견해가 타당한 것인지 살펴보자. 답을 먼저 말하면 [그림2]에서 보듯 실증적 근거가 없는 고정관념이다. 한국경제는 박정희 정부 때 이륙했다.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 가장 컸다. 1979~1980년의 불황과 1997년의 IMF 경제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 정권 때 일어났고 코로나19 사태는 진보 정권을 덮쳤다. 김대중 정부가 IMF 경제위기를 수습한 이후부터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까지 진보 정권 10년 동안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과 비슷한 상승세를 기록했다. 미국발 국제금융위기를 수습한 2010년 이후 2019년까지 변화 추세도 정권의 성향과 상관이 없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시장과 자유경쟁이 이륙의 선행조건을 만들어 주리라 믿지 않았기에 민주적 정부라면 결코 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일했다. 그는 성공 사례를 알고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권력을 중앙정부에 집중했고, 그 힘으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히틀러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전시(戰時)계획경제로 대량실업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해소했다. 패전으로 무너지기까지 두 나라는 두드러진 경제적 성공을 거뒀다.
- 나는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온전하게 사로잡지 못했다. 생애 전체를 볼 때 그가 일관성 있게 추구한 것은 권력 하나뿐이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했다. 그 시대 한국의 경제체제는 영국·프랑스·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경제시스템을 절충한 혼합경제체제였다.
- 국민이 골고루 잘살아야 좋다는 데는 이견이 나오기 어렵다. 그런데 잘사는 것(경제성장)과 고르게 사는 것(소득분배)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툼이 많다. 소득분배에 신경을 쓰다 보면 경제성장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려면 소득분배가 되도록 균등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실을 보면 둘 다 잘하는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는데, 한국은 소득분배가 고르지 않은 쪽에 속한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소득 격차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지 않다고 하는 이들도 과거보다 격차가 확대됐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 한국경제사에서 눈여겨볼 가치가 가장 큰 사건은 두 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성장과 관련해서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76)이고 소득분배와 관련해서는 IMF 경제위기다.
- 국내총생산과 비슷했던 때가 있었을 만큼 무역의존도가 높으며 수출과 내수를 막론하고 중요한 산업은 거의 모두 재벌 또는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제구조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산물이다.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의 비중이 임금노동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60%에 불과하며 고용안정성과 근로환경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기업은 쉽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률은 10% 수준에 불과하다. 중산층은 예전보다 줄었고 소득 격차와 자산 격차가 커졌다. 외국자본이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고 국내시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고 대기업들은 생산시설 일부를 외국으로 옮기고 부품과 중간재를 외국에서 조달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의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IMF 경제위기 이후 빠르게 심화됐다.
- 실패한 화폐개혁보다 더 노골적으로 재산권을 침해했던 1972년의 8·3긴급조치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재산권을 절대적으로 존중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아서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빌린 투자재원을 정부가 직접 기업에 나눠줬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더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으니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긴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대통령과 참모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이자율이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등쳤고,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에게 ‘통치자금’ 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재벌체제와 정경유착의 부패구조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 회장은 ‘국가와 재벌의 발전을 위한 동맹’을 형성했다. 5·16 직후 체포됐다 풀려난 기업인들은 ‘전국경제사범연합회’라는 비아냥을 듣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결성했다. 그 후 재벌 총수들은 대부분 한 번 이상 불법 비자금 조성, 회사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 제공, 분식회계, 탈세 등의 범죄 혐의로 입건됐는데, 검찰이 아예 기소하지 않은 경우도 허다했고 범죄 혐의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정도의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나마 시간이 지나면 대통령이 ‘국민경제 활성화와 기업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면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라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지금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위력을 발휘한다.
-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1789~1846)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는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이라 전망하면서,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해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한 후에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는 독일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保育關稅, Erziehungszoll)’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위협과 폭력이 항구적이고 효율적인 통치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이 국가의 목표를 자신의 개인적 목표로 여기고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하기 위해 교육을 통제하고 언론을 장악해 국민을 세뇌하려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불러들인다.
-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압축적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서유럽 산업국들은 주력산업 교체 주기가 20~30년이었지만 한국은 3~4년에 불과했다. 우리의 주력산업은 식품·섬유·봉제·신발·합판제조 등 단순 소비재산업에서 출발해 전기·가전 등 내구성 소비재산업과 철강·금속·정유·조선·원자력·자동차 등 중화학공업을 거쳐 전자·반도체·컴퓨터·이동통신 등 부가가치가 큰 첨단산업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그렇게 주력산업 교체가 빨랐던 원인은 모든 면에서 선진국을 따라잡으려고 한 정부의 산업정책이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재벌체제라는 특수 요인이 작용했다. 재벌은 어떤 개인을 중심으로 한 특수 관계인들이 경영 의사 결정권을 행사하는 대규모 기업집단이다. 재벌이 기업집단이 된 것은 사업 다각화(diversification)를 했기 때문이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 소비재산업에서 출발한 삼성그룹이 금융업과 가전산업을 거쳐 반도체·전자·보험·레저·정보통신산업으로 진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재벌은 처음에는 정부가 제공하는 산업자금에 의존했지만 점차 금융기관의 대출, 주식시장을 통한 직접금융 조달, 영업이익의 사내유보 등을 통해 독립한 자본의 왕국을 구축했다. 제당과 모직 등 수입대체 소비재산업으로 출발한 삼성그룹은 가전·석유화학·조선·기계 등 중화학공업을 거쳐 반도체·컴퓨터·산업용 전자기기·유전자공학 등 최첨단 산업으로 주력업종을 신속하게 교체했다. 이건희 회장체제로 넘어온 뒤 자동차산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삼성그룹은 하드웨어산업뿐만 아니라 정보처리 등 소프트웨어·이동통신기기·문화콘텐츠·의료서비스·의료기기·연료전지 등 신재생에너지산업 등으로 주력업종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한국경제 전체와 거의 동일한 주력업종의 교체 과정을 밟은 것이다.
- 재벌의 ‘사업 다각화’는 ‘문어발 경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하게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선진 경제를 따라잡으려면 우리도 부가가치 높은 중화학공업과 첨단산업을 보유해야 한다. 그런데 철강·금속·자동차·화학·플랜트 같은 중화학산업과 전자·통신·반도체·항공 등 첨단산업에는 막대한 초기 설비투자가 필요하며 그 재원을 조달할 수 있는 주체는 국가와 재벌밖에 없었다. 그런데 국영기업을 세워 중화학산업과 첨단산업을 육성하자면 국가 중심의 계획경제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계속해야 했고, 그게 어려워 민간에 맡길 경우에는 기존의 재벌 말고는 다른 주체가 없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도 민간독점자본주의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서 둘 모두 거부하면 주력산업의 교체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만약 재벌체제가 불가피한 선택이라면 문어발 경영의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재벌이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사업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규제하고 막강한 시장지배력으로 소비자와 협력업체를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일 뿐 실제로 시행하기는 어렵다. 독자적으로 자본을 축적한 재벌이 국가를 포획하는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 처음에는 정부가 ‘갑’이고 재벌이 ‘을’이었다. 사업허가와 자금을 받아야 사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런데 1980년대 3저 호황 시기에 재벌은 막대한 자본을 확보했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자 그 돈으로 정치권력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2002년 대통령선거 때 벌어진 ‘차떼기’ 사건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재벌 총수들은 보수정당에는 많은 자금을 제공했고 진보정당에는 ‘보험’ 차원의 적은 금액을 제공했다. 2005년 터진 소위 ‘삼성 X파일’은 삼성그룹이 정당과 정치인뿐만 아니라 경제부처의 고위공무원과 검사를 포함해 중요한 국가권력기관의 주요 인사들 전체를 관리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 대한민국 건설회사가 중동을 비롯한 외국 여러 나라에 지은 건물과 교량이 무너진 일은 없었는데 나라 안에 지은 것은 종종 무너졌다.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부정부패였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대부분 건설사를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없으면 만들었고, 만들지 못하면 인수합병이라도 했다. 그 목적이 불법 비자금 조성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토목건축사업은 환경, 교통, 안전 등과 관련해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 많다. 법을 제대로 지켜 인허가를 받는 것보다 공무원에게 돈을 주고 해결하는 게 훨씬 빠르고 저렴했다. 일단 구조물을 짓고 나면 겉으로 봐서는 철근이나 시멘트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여부를 알기 어렵다. 덜 넣고도 다 넣은 것처럼 서류를 꾸미거나 하청을 주면서 공사비 일부를 리베이트로 받으면 거액의 비자금을 만들 수 있다.
- 우리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국민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재벌기업이 지은 아파트를 선호하며 재벌기업이 만든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을 쓰고 재벌기업이 만든 승용차를 탄다. 재벌기업이 만든 옷을 입고 재벌기업이 생산한 스마트폰을 들고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프로 스포츠 경기를 본다. 재벌기업이 만든 화장품을 바르고 재벌그룹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재벌기업이 공급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청년들은 급여수준이 높고 근로조건이 좋은 재벌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하며, 자식이 재벌회사에 취직하면 부모는 경사라고 기뻐한다. 재벌은 지금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며 미래에도 그럴지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다.
- 1980년대 중반 한국경제는 ‘3저 호황’을 누렸다. 달러 가치와 국제유가와 금리가 모두 낮은 가운데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국내 경제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노조활동 자유 보장과 임금·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7~8월 대투쟁을 일으킨 것이다. 12월 대통령선거에서 12·12와 5·18의 주동자였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 득표율로 승리했지만 19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출현해 민주화는 더욱 진전됐다.
- 노태우 대통령은 소련·중국·동유럽의 옛 사회주의국가들과 수교해 거대한 수출시장을 새로 열었다. 그는 ‘북방외교’로 지구촌 냉전체제의 해체로 인한 국제 경제환경의 변화에 적극 대응함으로써 경제발전의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 1990년대 중반에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간 소비와 기업의 설비투자가 활발했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국정운영 방향으로 잡고 경제 질서와 경영 관행을 국제적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했으며 냉전시대의 ‘자본주의 계획경제’를 ‘개방형 시장경제’로 전환하려고 외환 거래와 민간기업의 해외 차입 관련 금융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긴급명령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하고 공직자 재산등록제도를 실시했다. 급진적 제도혁신으로 국민경제를 투명하게 만들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은 것이다. 한국경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널리 퍼져나갔다. 호황의 이면에서 위기의 징후가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것을 제때 포착한 경제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 IMF 경제위기의 원인은 기체결함과 조종미숙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 금융거래와 민간기업의 자본수입 규제를 완화하면 한국은행의 통화관리 능력이 크게 위축된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규제의 족쇄에서 풀려난 금융기업들은 선진국에서 낮은 이자율로 들여온 단기외채를 높은 금리로 동남아 기업에 장기 대출해 이윤을 챙겼다. 철강업을 비롯한 국내 기업의 장기투자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영업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이 잇달아 외환위기에 빠졌다. 국내에서도 정경유착으로 인한 불법대출 사건이 이어진 끝에 1997년 여름까지 한보·삼미·진로·대농·한신공영·기아 등 대형 재벌그룹들이 줄줄이 부도를 냈다. 안팎에서 위기 경보가 울린 것이다.
- 재벌그룹이 줄줄이 무너지자 금융기업은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았다. 금융기업의 재무 건전성이 나빠지자 한국경제 전체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다. 외국 금융기업들은 한국경제가 기울기 전에 채권을 회수하려고 단기채무 상환기간 연장을 거부했다. 그러자 당시 맹위를 떨치던 국제투기자본이 한국경제를 먹잇감으로 지목하고 원화와 원화표시 자산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환율이 치솟자 정부는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냈다. 외환보유고가 봄눈처럼 녹아 순식간에 30억 달러 수준으로 떨어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무디스와 S&P를 위시한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재빨리 한국경제 신인도를 낮췄고 환율의 추가 상승을 예측한 수출기업들은 수출대금을 밖에다 묶어 뒀다. 그럴수록 환율은 더 올라갔고 한국경제는 더 불안해졌다.
-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공급이 끊기자 기업과 금융기관은 국제거래를 할 수 없게 됐다. 종합주가지수 500선이 무너졌고 800원대였던 달러 환율이 1,000원을 가볍게 돌파했다. 국가부도 위기가 눈앞에 닥친 1997년 11월 21일, 한국경제는 기초가 튼튼해서 외환위기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던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11월 29일 IMF는 한국에 구제금융을 제공한다고 발표했고 12월 3일 임창렬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 1933~ ) IMF 총재가 21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협약서에 서명했다. 캉드쉬 총재는 협약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서약서에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등 유력 대통령 후보들의 서명을 받았다. 소위 ‘IMF 경제신탁통치’의 시작이었다.
- IMF가 추구한 목표는 명확했다. 박정희 정부가 구축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요소를 제거하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을 이식하는 한편 IMF의 구제금융 자금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의 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에 제공한 대출금과 이자를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
- 수익성 낮은 부실기업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금리를 대폭 높이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크게 축소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면서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자 실업자 수가 순식간에 130만 명을 넘어섰다. 이 모든 것은 IMF가 중남미와 동남아시아의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에 내린 ‘표준처방’에 따른 것이었다.
- 정부는 철도·통신·전력 등 국가기간산업의 공기업을 민영화 또는 사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탓에 국가채무가 급증했다. 그런 혼란과 고통을 겪은 끝에 대한민국은 2001년 구제금융 전액을 상환함으로써 IMF 경제신탁통치를 이른 시기에 마감했다.
- 한국경제의 기체결함은 ‘죽기에는 너무 큰(too big to die)’ 재벌이 국민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삼성·현대·LG·대우·SK 같은 대형 재벌그룹이 망하면 수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는다.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잘못 운영해 위기에 빠져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회사를 살려준다. 재벌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를 해서 돈을 벌면 자신이 갖고, 방만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기면 국가와 국민에게 짐을 떠넘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행동을 경제학자들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한다. 재벌 대기업은 보험료 한 푼 내지 않으면서도 국가를 최후의 보험자로 써먹은 것이다.
- IMF 경제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정부의 환율관리 실패였다. 기체결함이 있는 비행기를 미숙하게 조종한 것이다. 환율은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변한다. 장기적으로는 물가인상률이 환율을 좌우한다. 물가인상률이 높은 나라의 화폐는 지속적으로 값이 떨어진다.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 좌우된다.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화폐는 가치가 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고 수출가격이 떨어지면 수입이 줄고 수출이 늘어나 경상수지가 균형을 되찾는다. IMF 경제위기 직전까지 달러 환율은 계속 하락했다. 물가인상률이 더 높고 경상수지가 적자인데도 우리 돈의 가치가 계속 오른 것은 환율 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과 금융기관의 대규모 해외 차입과 외국자본의 직접투자 때문에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 공급이 늘어나 환율이 떨어진 것이다. 원화 가치가 실제보다 높게 평가된 덕에 국민은 저렴한 비용으로 해외여행을 즐기고 수입 소비재를 구입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은 착각이었다. 빚을 내서 집을 사고 파티를 즐기고 여행을 했던 셈인데, 국민은 그걸 몰랐다.
- IMF의 표준 처방전은 심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민간가계의 소비지출과 기업의 투자지출이 급감해 경기가 곤두박질한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지출을 감축하자 경기는 더 악화됐다. 기업의 차입경영 거품을 뺀다며 이자율을 사채금리 수준으로 올리는 바람에 일시적 유동성 부족에 빠진 우량기업들이 추풍낙엽 신세가 됐고 주식가격이 바닥인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해 막대한 국가자산의 손실을 입었다. 기업이 노동자를 사실상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시키자 노동조합은 힘이 빠졌고 실질임금은 하락했으며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모든 노동자를 덮쳤다.
- 김대중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구제금융을 받는 데 찬성했고 취임 후에는 최대한 신속하게 빚을 갚으려고 노력했다.
- 대한민국은 경제의 해외 의존도가 너무 높으며 핵발전소를 제외하면 국내 에너지원이 거의 없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경우 우리 기업은 대외결제를 할 수 없다. 에너지와 원자재, 부품을 제때 필요한 만큼 수입하지 못하면 수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국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멈춰 선다.
- IMF 경제위기는 몇 가지 중대한 결과를 남겼다.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과 비정규직 확대 그리고 이른바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의 소멸이다. 쉽게 말하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가 몰락했고 노동자의 지위는 약화됐으며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진 것인데, 이런 현상을 양극화 또는 격차의 확대라고 한다.
- 김대중 정부가 경제위기의 불길을 잡은 데 이어 노무현 정부는 한국경제를 다시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10년의 진보정부 시대에 우리 사회는 양극화의 골짜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정부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현실을 인정하고 기회 균등과 공정한 경쟁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경제 시스템을 수정했고,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정책을 확대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진보 정부는 국민경제를 잘 관리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집권 기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4%가 넘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1998년 7,355달러에서 2007년 2만 2,000달러 수준으로 상승했다. 물가상승률을 3% 수준에서 유지했고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내서 2007년 말 기준 2,5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쌓았다. 실업률을 3%대로 내렸고 달러 환율도 IMF 경제위기 전과 비슷한 900원 수준으로 돌려놓았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한국경제 신인도가 외환위기 전과 같은 A등급을 회복했고 종합주가지수는 처음으로 2,000을 찍었다.
- 그러나 국민의 실제적 경제생활은 거시경제지표만큼 개선되지 않았으며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제적 지위는 약해졌다.
- 소득불평등 또는 소득불균등을 측정하는 지표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지니계수는 모든 국민이 완전하게 균등한 소득을 얻으면 0,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면 1이 된다. 지니계수가 0.3 미만이면 소득분배가 고른 편으로 보며 0.4를 넘어가면 사회불안을 야기할 정도로 불균등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최고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을 최저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소득 격차가 커질수록 소득 5분위 배율은 높아진다.
- IMF 경제위기 이후 현재까지 시장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됐다. 정부가 조세와 복지지출을 통해 중산층과 저소득계층의 가처분소득을 늘리려고 노력했지만 시장소득 분배의 급격한 악화를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 시장소득 격차 확대가 가처분소득 격차 확대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고소득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교육·복지·보건·주거 분야에서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보조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 정권은 소득세와 법인세 등 누진세를 인상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 국회와 대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2003년 한나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인세율 인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노인 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연금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지만 빠르게 커지는 시장소득의 격차 확대를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진보 정부 10년 동안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
- 진보 정부 10년 동안 연평균 4%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도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중하위 소득계층의 경제생활이 어려워진 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 비정규직 확대, 낙수효과의 약화 등 여러 원인이 있었다. 재벌 대기업들은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는 방식으로 협력업체를 약탈했다. 내부거래를 통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함으로써 그 계열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중소 협력업체의 지불능력 악화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악화와 고용축소로 연결됐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소비재산업과 유통업까지 진출해 영세소기업과 영세 상인들의 몰락을 부추겼다.
-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비정규직 관련 법률들은 기대와 달리 비정규직의 확산과 비정규직 제도의 악용을 막지 못했다.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재벌 대기업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 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 전후방 연관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이 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을 본격화하자 낙수효과는 급격히 약화됐다.
- 국민은 2007년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진보 정부 10년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많은 국민이 7%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와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만들겠다는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 정부를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많이 지지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 정부가 진보 정부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뤘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 중 누적효과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 둘째,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시도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투기의 거품이 낀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 셋째,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여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 넷째, 수출을 증진하려고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렸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 표시 1인당 국민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민주화 공약도 실종됐다.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폐지, 재건축 요건 완화, 대출규제 완화 등 건설경기 부양을 위한 규제 해체 작업을 했을 뿐이다.
-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 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됐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 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었다. 기초연금과 장기요양보험, 보육비 지원 확대 등 이전 정부 때부터 제도적으로 시행했던 복지지출 확대를 이어간 것 말고는 소득분배를 개선하고 양극화를 완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만한 정책이 없었다.
- 문재인 정부는 경제정책 기조를 크게 바꿨다. 사회복지 지출을 확대해 중하위 소득계층의 가처분소득을 높여 민간소비를 진작하는 한편 공정거래 질서를 강화하고 고용구조를 개선해 양극화를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집권 초기의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고용보험 확대 등이 그런 정책이었다.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이 ‘사회주의’,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던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는 양극화 현상이 크게 심화됐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기는 이르지만 활용 가능한 몇몇 데이터를 보면 적어도 양극화 완화에는 일정한 성과가 있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률과 실질성장률은 1990년 이후 정부의 성향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보수 정부는 경제성장을 장담했고 진보 정부는 양극화 해소에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어느 쪽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보수 정부는 부가가치를 많이 내는 신산업 육성에, 진보 정부는 공정한 거래질서 확립에 방점을 찍었지만 어느 정부도 둘 모두 중요한 과제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여운은 아직도 짙게 남아 있다. 우리 국민은 경제성장을 위해 정부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가 거의 똑같은 정책을 추진했다. ‘녹색성장’, ‘신성장 동력 산업 발굴’, ‘혁신성장’ 등 그 이름이 무엇이었든 한국경제의 주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을 선정해 집중 지원했던 것이다. 애초에 잘못 선정하거나 결과적으로 실패한 분야도 있었지만 한국경제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성장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 2020년 초 지구촌을 덮친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성장에 대한 담론은 일시적으로 위력이 줄었다. 접촉과 이동이 막힌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세계경제 전체가 침체와 하락의 일방통행로에 들어섰고 방역에 실패한 나라일수록 더 심각한 역성장을 기록했다. OECD는 2020년 9월 16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세계경제성장률을 –4.5%로 전망했다. 한국은 –1%로 35개 회원국 가운데 그나마 가장 양호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이 속한 유로존 국가의 평균은 –7.9%, 미국과 일본은 각각 –3.8%와 –5.8%였다. 우리나라는 박정희 시대에 소규모 개방경제로 가는 길을 선택해 성공을 거뒀다. 노태우 정부가 옛 사회주의 국가들과 서둘러 수교한 데 이어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내걸고 그 흐름을 더 분명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도 노선을 바꿀 수 없게 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첫 자유무역협정(FTA)인 한칠레FTA를 체결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층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FTA를 타결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자유무역협정은 농산물과 보건, 교육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 모든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는 협정이다. 우리나라만큼 많은 국가와 FTA를 맺은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 자유무역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자유무역에 참여하는 국민경제는 ‘비교우위’가 있는 산업으로 전문화한다. 여러 국가들이 동시에 관세를 낮추거나 폐지하면 비교우위 산업은 이익을 얻고 그렇지 못한 산업은 손실을 입는다. 하지만 이익을 얻는 산업의 이익 규모가 손실을 입는 산업의 손실 규모보다 크기 때문에 국가의 부는 늘어난다. 따라서 이익을 얻는 산업의 이익 일부를 조세로 징수해 손실을 입는 산업과 종사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할 수 있다. 가능성이 있는 산업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렇지 못한 산업과 종사자에게는 다른 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와 비용을 제공하는 것이다.
-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사건은 우리가 국민국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냉전 해체 이후 30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그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경영자들도 자본에 여전히 국적이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미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워 글로벌 경제질서를 혼란에 몰아넣었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1946~ ) 대통령의 시대가 끝났으니 세계경제는 자유무역 분위기로 복귀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규율하는 ‘세계제국’이 들어서지 않는 한 우리는 국민국가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국민경제는 자유무역의 흐름을 타고 국제 분업체제 안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며, 우리 정부는 국민적인 합의를 이뤄 그 부작용인 양극화 또는 격차의 확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대한민국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반응형
4. 전국적 도기봉기를 통한 한국형 민주화
-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 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개혁을 할 수 있는 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 산업화를 이룬 동력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었다면, 민주주의를 세운 힘은 부당한 외적 강제와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누리려는 욕망이었다.
-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통치자가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고, 시민이 그것을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거나 굴종하면 헌법은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는다.
- 정의·평등·인간해방 등 내세우는 목표가 무엇이든,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라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 단,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 데서 멈춰야 한다.
- 집권세력 또는 정부가 권력을 오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당과 재야(在野)인사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재야인사는 지식인·종교인·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 인사들을 말한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쟁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 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이 여기에 합세하지 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하면서 경찰을 동원해 주동자를 구속하고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일어나 일반 시민의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나아가면 이제 공안당국이 나선다. 소요사태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첩단 사건이나 반국가단체 조직사건을 터뜨린다. 비판적인 언론보도를 통제하고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국가적 위기가 온 것처럼 시민을 세뇌한다. 웬만하면 이런 정도로 상황이 끝난다. 그래도 끝나지 않으면 최루탄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력을 투입해 시위자를 마구잡이로 연행하고 구속한다. 지치고 겁이 난 시민은 분노를 삭이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집권세력은 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 가끔은 아주 많은 국민이 공분을 느낀 나머지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투쟁에 열렬히 호응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민주화운동의 전국조직이 출현한다. 야당과 재야, 학생단체, 노동단체와 농민단체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국민협의회’나 ‘국민운동본부’라는 전국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줄이면 ‘국본’, 익숙한 이름이다. 국본은 투쟁목표를 제시하고 구호를 정하며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집회 장소와 시간과 행동강령을 선포한다. 이 모든 행동의 전술적 목표는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며 전략적 목표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사태를 막으려고 집권세력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남김없이 동원한다. 국본의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활동가들을 예비 검속하며 경찰을 투입해 시위 예정 장소를 봉쇄하고 물샐틈없는 검문검색을 벌인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담화를 발표해 소요사태 주동자를 엄벌하겠다고 겁을 주고 공안기관과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배후에 불순용공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진압에 성공하면 집권세력도 잠시 조심한다. 민심을 수습한다며 내각을 개편하고 유화책을 발표한다.
- 그런데도 투쟁열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사태가 정말 심각해진다.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질 경우 정부는 속수무책이 된다. 예컨대 전국 10대 도시에서 100만 명 정도의 시민이 동시에 시위를 벌일 경우 전국 경찰을 다 투입해도 제압하지 못한다. 시위대는 큰길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불리하면 뒷골목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 다시 도로를 점거한다. 진압경찰은 방패와 곤봉, 방독면을 비롯한 보호 장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만화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싸움이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진압경찰이 거꾸로 포위되어 장비를 빼앗기고 얻어맞는 상황이 생긴다. 결국 경찰은 주요 시설 근처에 병력을 모아 진을 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서울 같으면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청사 근처 대로와 골목에 병력을 집중배치하고 시위대와 대치하는 것이다. 도심을 장악한 시위대는 여유 있게 정부를 규탄하는 거리집회를 연다. 그러면 점점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든다.
- 이럴 경우 정부가 쓸 수 있는 무기는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밖에 없는데, 매우 위험하다는 게 문제다. 1964년 6·3사태나 1979년 부마항쟁 때 정부는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4·19 때는 계엄군 수뇌부가 시위진압을 거부했다. 군이 발포를 하고서도 투쟁을 진압하지 못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4·19 때는 경찰에게 발포를 지시한 사람이 사형을 당했다. 진압에 일시 성공하는 경우에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때 특전사 병력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들은 그 책임을 피하려고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끝끝내 사실을 부정했다. 1987년 6월 전국 수십 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동시에 거리시위를 벌였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를 검토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그 대신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앞세워 6·29선언을 발표하고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때도 조현천 기무사령관을 비롯한 일부 장성들이 계엄령 선포와 병력 배치계획을 세웠지만 미수에 그쳤다. 너무나 위험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는 다양한 ‘현행법 위반 행위’를 수반한다. 도로점거·투석·화염병 투척·야간시위 등 시위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실정법과 충돌한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불가피한 수단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모두는 주권자가 저항권을 행사한 정당행위가 된다. 한국의 민주화는 이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을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그 민주주의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가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지만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렸다. 자유·정의·민주주의·인간적 존엄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 인류 역사는 반란·봉기·내전·혁명·전쟁의 연속이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던 사람들을 덮친 게 혼돈이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힘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정리하고 해석하면 비로소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 역사도 그렇다.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4·19, 5·16, 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 그 사태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언제나 혼돈이었다.
-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보여줬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민주화운동을 완성했다. 대한민국은 다수 국민이 원하면 평화·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활용해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거나 완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 민주항쟁 이후 지금까지 우리의 민주주의는 깊어지고 넓어졌다. 완숙하지는 못했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성숙하는 중이다.
-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길게 보면 제도는 의식과 행태의 산물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특정한 제도가 그에 맞는 의식과 행태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 정당에 대해서, 통일문제에 대해서, 혁명에 대해서,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진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견해를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제약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 1997년 12월 대선에서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의 기본권 행사를 제약하지 않았으며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게 했다.
-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칠레FTA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 났을 때도 공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이 현직 대통령을 지키려고 연속·동시다발·전국적 집회시위를 벌인 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것을 국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 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 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독단으로 결정한 데 있었다. 시민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 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데 그 촛불집회가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 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는 젊은 어머니와 직장인을 끌어들여 연속·동시다발·전국적 집회시위로 이어졌다. 시민은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진압과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 촛불혁명은 우리 정치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황교안 총리가 권한을 대행했으니 4·19처럼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은 아니었다. 헌법개정을 목표로 삼았던 6월 민주항쟁과 달리 헌법에 있는 탄핵 제도를 실행해서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파면하게 하는 데 초점을 뒀다. 다섯 달 동안 이어진 야간집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로웠고 정부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했다. 돌멩이 하나 날지 않았고 최루탄 한 발 터지지 않았다. 헌법과 법률이 정한 대로 60일 안에 선거를 해서 새 대통령을 뽑았고 5월 9일 당선한 문재인 후보는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취임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시위, 홍콩의 우산시위, 파리의 노란조끼시위보다 훨씬 많은 시민이 참여했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랄하고 평화로웠다. 21세기 지구촌에서 현직 대통령의 탄핵과 새 정부 수립을 그토록 질서정연하게 이뤄낸 나라는 없었다.
- 87년체제는 그대로지만 우리의 의식과 행동양식은 더 성숙했다. 시민들은 예전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폭넓고 더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한다. ‘명박산성’과 물대포가 등장한 2008년 이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까지 우리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거나 퇴행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겉으로 드러난 양상이었을 뿐이다. 보수정당 집권기에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잘 작동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를 했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무너지지 않았고 국민의 생각과 행동양식은 발전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앞으로 더 성숙할 것이다.
반응형
'취미. >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 트루스] (3) (0) | 2022.08.03 |
---|---|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 트루스] (2) (0) | 2022.08.02 |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 트루스] (1) (0) | 2022.08.01 |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3) (0) | 2022.07.28 |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1) (0) | 2022.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