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독서노트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 트루스] (4)

Place-B 2022. 8. 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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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통적인 미디어가 쇠퇴하다

 

저널리즘이란 다른 누군가가 활자화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실을 활자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외에는 모두 선전 행위에 불과하다.  - 조지 오웰

 

미디어와 언론의 역사

미국에서 전통적인 미디어가 전성기를 누릴 때만 하더라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로 대표되는 주요 신문사와 ABC, CBS, NBC로 대표되는 TV 방송국이 뉴스를 전달하는 주된 매체였다. 1950년에 미국 일간 신문 평균 발행 부수는 하루에 5,380만 부(총 가구 수 대비 123.6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에 달했다. 가구 당 100퍼센트를 넘는 수치다. 즉, 일부 가구에서는 신문을 ‘둘’ 이상 구독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2010년에 미국 일간 신문 평균 발행 부수는 4,340만 부(총 가구 수 대비 36.7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에 불과했다. 신문사들은 구독자를 70퍼센트 가까이 잃었다. 이는 TV 방송국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TV 방송은 하루에 30분만 뉴스를 내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방송국에서는 탐사 보도에 많은 노력을 투자할 수 있었다.

 

TV에 뉴스가 나오는 시간은 제한적이었지만 뉴스 보도국에서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뉴스로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8년에 CBS에서 〈식스티 미니츠60 Minutes〉라는 뉴스 프로그램을 내놓으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식스티 미니츠〉는 방송 시작 3년 후 역사상 최초로 ‘수익을 내는 뉴스 프로그램’ 자리에 등극했다. 그 순간 방송사들은 눈이 번쩍 뜨였다. 뉴스 제작 체계나 뉴스에 대한 기대가 즉시 뒤집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방송국 경영진은 뉴스가 수익을 창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방송국의 전성기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1979년에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가 벌어지면서 방송국은 난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대중이 더 많은 뉴스를 갈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는 예능국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이러한 대중의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 ABC 방송국은 색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당시 매일 진행하던 이란 소식 브리핑을 늦은 저녁 시간대로 옮긴 것이다. 이는 마케팅을 노린 결정이기도 했다. 어차피 경쟁사인 NBC에서 조니 카슨이 진행하는 유서 깊은 토크쇼에 대항할 만한 동시간대 프로그램이 ABC에는 없었고 굳이 프로그램을 편성한다면 뉴스가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ABC는 저녁 시간에 〈나이트라인Nightline〉이라는 신규 방송을 편성해 당시 인질 사태를 집중적으로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전략은 큰 성공을 거뒀으며 〈나이트라인〉은 1년 뒤 인질 사태가 종결된 이후에도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혹시 이보다도 더 많은 뉴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까?

1980년, 다음 주자로 CNN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CNN의 시도는 도박과도 같았다. 24시간 내내 뉴스 프로그램으로만 채널을 가득 채우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코펠이 이란 문제를 놓고 전문과들과 끝없는 인터뷰 행진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그 이상 많은 전문가와 뉴스거리를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시청자들은 앵커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시간이나 다음 판 신문을 기다리는 대신 24시간 내내 원할 때마다 뷔페처럼 들락날락할 수 있는 뉴스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할까? 놀랍게도 CNN의 시도는 통했다. 뉴스의 질이 주요 방송국과 비교했을 때 ‘싱겁다’는 비판은 있었지만 CNN의 시도는 즉시 성공을 거뒀다.

 

1980년대는 물론 그 이후까지 챌린저호 폭발 사건, 톈안먼 사태, 베를린 장벽 붕괴, 걸프전 발발 등 굵직한 사건 사고가 연달아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케이블 뉴스 채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CNN 채널의 시청률 역시 올라갔다.

 

 

보수 진영은 뉴스가 늘 좌편향되어 있다고 끊임없이 불만을 터뜨려왔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이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전통적인 매체들과 경쟁할 대안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림보는 자신이 미국 언론의 대척점에 서 있는 진실의 근원이라고 내세웠다. 당시 모든 언론이 빌 클린턴Bill Clinton과 같은 진보 정치인에게 편향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신이 미국을 위해 목소리를 내겠다고 시도한 것이다. 림보의 시도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이 시점부터는 사람들은 당파적인 뉴스 보도가 시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1996년 7월에는 MSNBC가 설립되었다. 얼마 뒤 1996년 10월에는 폭스뉴스Fox News가 등장했다. 양쪽 다 스스로를 CNN의 대안으로 꼽았다. 어느 순간부터 MSNBC는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질 만큼) 진보에 편향적인 방송국의 지위를 차지했다. 반면 보수 진영 미디어 고문 로저 에일스Roger Ailes가 창립한 폭스뉴스는 초창기부터 확실한 노선을 드러냈다.

 

  • 새로운 전자 시장 시대에 폭스뉴스가 등장한 사건은 사람들이 뉴스 공급원을 선택하는 면에서도 당파적 대립이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선언과도 같았다.

 

 

2013년에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LA타임스》에서는 29퍼센트, 《워싱턴포스트》에서는 17퍼센트의 칼럼만이 기후변화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폭스뉴스에서는 출연한 논객 69퍼센트가 기후변화에 회의적이었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CNN에서는 개인 의견에 바탕을 두고 있는 뉴스 보도 내용이 4퍼센트에 머물렀지만 폭스뉴스에서는 68퍼센트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폭스뉴스에서는 ‘객관적인 뉴스’와 ‘당파적인 의견’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으며 골수 폭스뉴스 시청자들은 뉴스에서 접한 잘못된 사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믿고 퍼뜨릴 있었다. 실제로 2011년도에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폭스뉴스 시청자들은 아무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들보다 정보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 폭스뉴스와 MSNBC가 둘 다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모습을 보면 당파를 떠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방송사 입장에서 시청자들의 편견에 동조하는 의견들로 방송을 가득 채우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사실은 이해하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풍조는 아니다. …… 처음에는 ‘절대적인 객관성’을 달성할 수는 없다는 합리적인 시각에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폭스뉴스와 MSNBC는 객관성을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 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정치적으로 양극단에 속하는 지지자들(결국 충성스러운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버나드 메이도프(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 사기 주동자)가 투자 시장에서 이용한 전략을 저널리즘 업계에서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메이도프는 고객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들려주었고, 나중에 진실이 드러났을 때 이미 투자금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어떤 사람들은 폭스뉴스에서 제공하는 모든 프로그램이 ‘가짜 뉴스’의 배후나 다름없다며 비난하기도 하지만 가짜 뉴스가 폭스뉴스가 아니라 풍자극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도 존재한다.

 

2014년에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믿음직한’ 뉴스 출처를 선택해달라고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선호하는 당파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폭스뉴스가 44퍼센트로 1위를 차지했다. 진보주의자 가운데에서는 정통 저녁 뉴스 프로그램이 24퍼센트로 1위를 차지했으며, PBS(미국 공영 방송), CNN, 〈더 데일리 쇼The Daily Show〉가 2위 자리를 놓고 삼파전 양상을 띠었다. 아니, 그런데 〈더 데일리 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닌가? 2015년까지 〈더 데일리 쇼〉의 앵커 자리를 맡은 존 스튜어트Jon Stewart는 자신의 입으로 본인이 뉴스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튜어트의 역할은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이었지 사실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많은 청년들이 〈더 데일리 쇼〉에서 뉴스를 접하는 것처럼 보이자 ‘진짜’ 뉴스를 보도하는 사람들의 염려는 점점 더 커져갔다. 스튜어트는 스스로를 이렇게 변호했다. “내가 충분히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거라면 그건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스튜어트의 〈더 데일리 쇼〉를 비롯해 《뉴요커New Yorker》나 《디 어니언The Onion》과 같은 풍자 매체들은 쉽게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최근 《LA타임스》에 실린 기명 논평 “진보 진영도 ‘코미디’라는 탈진실 문제를 겪고 있다”에서 스티븐 마시Stephen Marche는 이렇게 주장한다. “트럼프주의를 번영하게 만든 탈진실 현상은 진보 진영의 풍자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 2009년 《타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방송에 나오는 뉴스 앵커 중 가장 신뢰도가 높은 앵커는 존 스튜어트였다.

 

하지만 이는 불공평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거짓말과 헛소리를 하면서 진실이라고 속이려고 애쓸 때마다 오래도록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풍자이기 때문이다. 풍자는 본질적으로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풍자의 요점이기도 하다. 풍자는 일부러 현실을 비꼼으로써 현실 세계의 불합리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르다. 그런 풍자를 진짜라고 받아들인다면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다. 풍자의 목표는 남을 웃기는 것이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마시 본인도 이렇게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 정치 풍자는 가짜 뉴스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풍자 작가는 언론 특유의 가식을 벗어던짐으로써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고자 한다. 반면 가짜 뉴스 사이트는 언론 특유의 가식을 활용함으로써 이미 거짓임을 알고 있는 내용을 퍼뜨리고자 한다. 하지만 마시는 설령 둘의 의도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똑같다고 주장한다. “정치 풍자 작가와 관객은 뉴스 자체를 농담거리로 바꿔놓았다. 그들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든 미국의 정치 담론 현장에 탈진실 현상을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어떤 메시지가 추종자들 사이에서 의도치 않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 그 메시지의 모든 유포자가 책임을 져야 할까? 아니면 사람들이 진실이 아닌 내용을 믿도록 의도적으로 속인 첫 번째 유포자만 책임을 져야 할까? 하지만 속이려는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에도 책임을 추종자들에게 돌리고 자신의 편향적인 태도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편향된 미디어가 가져온 문제

1996년, 케이블 뉴스쇼가 인기를 얻으면서 전통적인 뉴스 프로그램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것’과는 동급으로 묶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요 방송국, 신문, CNN은 ‘객관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별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미디어 입장에서는 여태까지 자신들이 진보 편향적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정말로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어떤 논점을 다루더라도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보도의 객관성이 높아지기는커녕 정확한 뉴스 보도에 집중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각 당의 지지자들이 필사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실제로 자기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해버리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저널리즘의 높은 표준은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통적인 언론은 이를 감수하고자 했다. 언론이 객관성에 집착한 결과, 사실 문제를 전달할 때조차 모든 입장에 ‘균등한 시간’을 배정하고 양쪽 이야기 모두를 공평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만약 찬반 의견이 갈리는 주제였다면 이러한 태도가 합리적이라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사실 문제를 전달하는 보도에서는 재앙과도 같았다. 언론은 실제로는 믿을만한 양쪽 입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주제를 다룰 때도 ‘동일 시간 배분’의 원칙을 따르느라 양쪽 입장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게 되었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이 객관성에 대한 언론의 집착을 어떤 식으로 이용했는지는 이미 제2장에서 살펴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더 이상 전면광고를 실을 필요가 없었다. 어떤 과학적인 주제에 대해 ‘다른 연구’가 존재하는데도 언론이 해당 연구를 다루지 않으면 그것은 그 언론이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겁박을 주기만 하면 되었다. 미끼를 물어버린 언론은 기후변화나 백신과 같은 과학적인 문제조차 ‘논란이 많은 이슈’라고 착각하면서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논란’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이 꾸며낸 거짓인데도 말이다. 허위 정보를 퍼뜨리려는 시도를 언론마저 방조하는 가운데 결국 일반 대중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기후변화가 정치적 이슈로 떠오르기 훨씬 전인 1988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차원에서 ‘지구온난화 현상’과 맞서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뒤 지구온난화는 지극히 당파적인 논점으로 탈바꿈했다. 그 사이에 석유 회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줄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미디어로 하여금 연구 결과를 보도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들은 정부 관료들에게 자금을 후원하고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활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다.

 

전 세계 기후학자들이 기후변화가 진행되고 있고 인간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합의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진실을 흐리기 위해 조작된 의혹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힘만으로 이 문제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금전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또한 ‘회의론자’들이 존재하는 이상 언론 역시 기후변화를 논란이 많은 이슈로 보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심사를 거친 과학 저널 중 어떤 논문도 인간의 활동으로 배출된 배기가스가 지구온난화를 유발한다는 결론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는데도 최근 신문 기사 중 절반 이상은 기후변화를 반박하는 입장 역시 똑같은 비중을 두고 다루고 있다. 결국 과학적인 증거가 충분한데도 기술적으로 사소한 흠을 찾아내 문제 삼는 반대자들 때문에, 대중은 아직도 과학자들이 기후변화가 실재하는지 혹은 기후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줄 착각한다.

 

 

당연히 대중은 혼란을 겪었다. 기후변화 문제가 과학적으로 논란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만약 논란이 없다면 방송에서는 왜 굳이 논란이 있는 것처럼 진행하는 것일까?

 

뉴스에서 봤다는데, 누가 대중을 욕할 수 있을까? 언론은 자신들이 편향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느라 정작 ‘진실을 전달하는 일’은 도외시하고 있었다. 조작된 의혹을 가지고 진실에 대한 혼란을 퍼뜨리고자 했던 자들의 손에 제대로 놀아난 것이다. 언론은 어째서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까? 부분적으로는 보도에 태만했기 때문이다. 한 해설자는 이렇게 평한다.

 

  • 객관성은 뉴스 보도가 게을러질 구실을 제공한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데 ‘양쪽의 입장 전달’까지 조사해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이야기들도 논의의 한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번번이 ‘최신 기사’에만 집착하느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확장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참이라고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반대되는 거짓 논리를 접하는 순간 의도적 합리화 현상이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꾼은 미디어를 이용하고 있고 미디어는 시청자를 오도하고 있다. 물론 게으름 말고 다른 요인도 있다. 바로이윤이다. 언론계에서 점점 경쟁이 심화되면서 방송국들은 어느 정도 드라마를 품고 있는 ‘이야기’를 찾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자신의 책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에서 서술한 내용 중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그건 바로 미디어가 진실보다 논란을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TV 뉴스뿐 아니라 종이 언론도 비난을 피해갈 없다. 2004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루는 미국 주요 신문들의 편향된 균형Balance as Bias:Global Warming and the US Prestige Press>이라는 논문에서 맥스웰 보이코프Maxwell Boykoff 줄스 보이코프Jules Boykoff ‘균형 잡힌 보도’라는 개념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로 하여금 대중이 기후변화 문제를 완전히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지적한다. 여기서 거론되는 문제는 정치적 편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학자들이 ‘정보 편향information bias’이라고 부르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정보 편향이란 기자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뉴스를 보도하는 방식이 전달해야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말한다. 요컨대 경우에는 ‘주요 신문사’들이 지구온난화에 대해 보도하는 내용이 과학계에서 합의한 내용으로부터 벗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객관성, 공정성, 정확성, 중립성이라는 저널리즘의 가치에 고착하는 것이 어째서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은 것일까? 균형 잡힌 보도를 해야 한다는 압력에 굴복한 언론이 열성 당원들(결국 언론을 진실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이득을 보는 사람들) 제공하는 정보마저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결과 극단적인 의견에도 지나친 신뢰성을 부여하는 ‘반대 담론’이 형성되었다. 균형 잡힌 보도 때문에 소수의 지구온난화 회의론자들이 내놓은 의견이 다수의 의견처럼 확장되어 보였다. 문제는 지극히 단순했다. 요리를 하면서 썩은 재료를 하나만 넣더라도 요리 전체가 썩은 맛이 나는 것과 유사하다.

 

  • 균형 잡힌 보도가 목표로 한 것은 중립성이었다. 기자들은 중요한 문제라면 어떤 문제를 다루든 찬반 양쪽에서 적당한 대변인을 찾아 양쪽 입장 모두를 제시해야 하며 양쪽에 거의 동일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균형을 좇다보면 종종 사실 확인 절차를 빠뜨릴 위험이 있다.

  • 일반적인 기자라면 학술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혼자 힘으로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할 시간도 전문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과학적인 문제가 보도되는 방식에 따라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이념적인 ‘전문가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미디어의 쇠퇴가 탈진실에 미친 영향

오늘날 저널리즘의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미디어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 개인 의견에 기반을 둔 내용, 때로는 논평조차 붙이지 않는 내용을 내보내는 방송이 점점 더 인기를 얻으면서 시장 점유율을 잃어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실을 옹호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편향된 방송이라는 비판을 뒤집어쓰고 있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있기에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과학적 사실에 의혹을 퍼뜨리려는 사람들을 무시하면 한쪽 이야기만 들려준다고 비난을 받는다.

 

전통적인 미디어는 맹비난을 받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 보도를 모두 ‘가짜 뉴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선거 유세 중에는 언론인을 가리켜 “지구상에서 가장 부정직한 인간 부류 중 하나”라고 일컫기도 했다. 그런데 트럼프의 발언이 대중에게도 통했다. 최신 갤럽Gallup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중 매체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도는 전례 없는 바닥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역시 탈진실로 향하는 또 다른 발판일 뿐이다. 이제 어느 뉴스든 당파심이 강한 시청자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전통적인 미디어와 대안적인 미디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또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성과는 동떨어진 가치를 추구하는 출처로부터 뉴스를 확인하려고 한다. 사실 오늘날에는 어떤 미디어가 편향되었는지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다. 따라서 어차피 모든 미디어가 편향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치우친 미디어를 선택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셜미디어가 주목을 받으면서 이러한 정보 대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인터넷상에서는 사실과 의견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타나는데 무슨 정보를 믿어야 할지 누가 알겠는가? 여과 장치도 검증 장치도 없는 미디어를 이용하는 오늘날의 시청자들과 독자들은 순전히 당파적인 의견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다. 어차피 주류 언론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퍼뜨려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더 이상 언론이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전달하게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제 자신들의 미디어 창구를 이용해 직접 퍼뜨리면 된다.

 

만약 그것마저 실패한다면 ‘트위터’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 미디어가 적이라고 생각한다면 트럼프처럼 직접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면 된다. 미국 대통령 의견을 중간 과정도 없이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굳이 사실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진실을 끌어내릴 준비는 모두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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