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독서노트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 트루스] (5)

Place-B 2022. 8. 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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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소셜미디어의 출현과 가짜 뉴스의 범람

 

소셜미디어의 등장

2004년에 페이스북이 처음 만들어질 때만 하더라도 페이스북은 지역 카테고리 안에서 사용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친구’와 소통을 하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사회관계망 사이트에 지나지 않았다. 사용자들은 서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고 동일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커뮤니티 활동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성장을 거듭하면서 페이스북은 통합 뉴스 제공 사이트로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신의 페이지에 뉴스 기사를 공유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었다. 페이스북은 페이지 우측에 화제의 기사를 보여주는 ‘트렌딩Trending’ 탭을 직접 관리(및 편집)하고 있었다. 트렌딩 탭은 ‘좋아요like’ 기능을 기반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만한 뉴스 기사만 겨냥해 전시되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회사들도 소셜미디어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생성하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에서 더 나아가 다른 출처에서 기사를 끌어오는 대안 뉴스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렇게 2005년에 유튜브가, 2006년에 트위터가 만들어졌다.

 

소셜미디어가 새로운 뉴스 매체로 떠오르면서 사실과 의견의 경계는 더욱 흐려졌다. 사람들은 블로그나 대안 뉴스 사이트 등 어딘지도 모를 출처에서 정보를 가져와 모든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공유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의도적 합리화 정신을 부추기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입맛에 맞지 않는 전통 미디어의 사실 정보 대신 정확성이 검증되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뉴스’ 기사만 클릭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확증 편향을 강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미디어와 달리 공짜로 뉴스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흐름을 부추겼다.

 

검증하고 편집하는 과정이 한층 더 약화된 상황 속에서 무슨 수로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가려낼 수 있을까? 전통적인 뉴스 미디어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어떤 정보가 믿을 만한 출처에서 나왔고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만큼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뉴스만 선택적으로 읽고 믿어버리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정보의 양극화와 파편화를 부추기는 ‘뉴스 사일로’ 문제가 대두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뉴스를 확인한다는 말은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친구 삭제’ 하듯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 출처를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뉴스피드News Feed’에 올라오는 정보들의 진실 여부는 페이스북 친구들의 검증 실력에 맡기거나 ‘좋아요’ 개수를 기준으로 기사를 선별하는 페이스북 알고리즘의 능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

 

관리감독을 거치지 않은 정보가 때때로 ‘뉴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다 보니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기가 어렵다.

 

기사의 출처를 확인하면 된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출처가 믿을 만한지는 확신할 수 있을까? 출처에 《뉴욕타임스》라고 적혀 있다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인포워스InfoWars’라고 적혀 있다면? ‘뉴스맥스Newsmax’라거나 ‘ABC뉴스닷컴닷시오ABCNews.com.co’라면?

 

  요즘에는 뉴스의 출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신경 써서 확인하지 않으면 어디가 신뢰할 만하고 어디가 신뢰할 만하지 않은지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일부 뉴스 공급원들은 최대한 믿을 만한 출처처럼 보이기 위해 교묘하게 위장하기도 한다. ‘ABC뉴스닷컴닷시오’는 ‘ABC뉴스’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실 확인 과정을 거친 기사가 있다고 한들 온갖 거짓말이나 선동과 섞여 있는데 무엇이 진실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정치적 이념을 내세우려는 자들이 사람들의 무지와 편향을 이용하기에 너무나도 적절한 환경이 갖추어지고 말았다.

 

가짜 뉴스의 역사

어떤 사람들은 ‘뉴스’라는 개념이 탄생하는 순간 가짜 뉴스 역시 함께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가짜 뉴스는 검증을 거친 ‘객관적인’ 뉴스보다 훨씬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객관적인 뉴스는 기껏해야 20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론계 거물인 윌리엄 허스트William Hearst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신문 발행 부수를 두고 경쟁을 벌인 바로 시기가 ‘황색 언론yellow journalism’의 시대라고 불린다. 1890년대 황색 언론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어디서 유래했는지 확신할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진실을 전달하기보다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데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스캔들을 쫓아다니면서 선정적이고 도를 넘는 방식으로 보도하는 언론을 가리켰던 분명하다. 상황은 얼마나 심각했을까? 전쟁이 벌어질 만큼 심각했다. “뉴욕 저널리즘 업계에 허스트가 나타나 격렬한 발행 부수 경쟁을 벌이지만 않았더라면 미국-스페인 전쟁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황색 언론의 광기가 절정에 달한 바로 그때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색 언론의 선정성이 극에 달해 있던 1896년, 《뉴욕타임스》는 보도 방식으로서 ‘이야기’ 전달 모델 대신 ‘정보’ 전달 모델을 강조함으로써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연합통신이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가진 고객들에게 호응하려고 사실 정보를 담고자 한 반면, 《뉴욕타임스》는 비교적 상류층에 속하는 부유한 독자들만을 겨냥해 사실 정보를 보도하고자 했다.

 

인터넷 뉴스가 등장하자 우리 세대 언론의 가치관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짜 뉴스가 다시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디지털 뉴스가 황색 언론을 다시 전면으로 내세웠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은 뉴스 출처로부터 기대할 만한 가치라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많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힘없는 대중’의 생각을 움직일 만한 동기와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적은 비용으로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낼 있을 때까지는, (혹은 누구든 당대의 재력과 권력을 손에 사람) 자신만의 진실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가짜 뉴스로 오염된 미디어라고 할지라도 ‘무료 미디어’라는 존재는 가히 혁명적인(그리고 최근에야 등장할 있었던)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런 대가 없이 무료 미디어를 이용할 있다거나 진실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뉴스 미디어는 등장 이후로 거의 줄곧 편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신문은 신문사 소유주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편향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객관성을 언론의 당연한 가치로 여기다가 자신이 뉴스 출처가 실제로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사실에 기반을 공정한 보도를 기대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기대를 언론에 요구하기 위해 언론을 금전적으로 지원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었는지 진심으로 주의를 기울여본 적이 있는가? 그저 기술을 탓하면서 “요즘은 상황이 다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 자체에는 언제나 가짜 뉴스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인쇄기든 전신이든 모두 우리가 언론으로부터 기대하는 가치를 촉진하기도 했지만 저해하기도 했다.

 

한편 기술은 우리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쳐왔다. 인터넷이 등장한 뒤로 뉴스를 접하기가 너무나 쉬워지고 비용이 들지 않는 탓에 우리는 게을러졌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비판적 사고 능력이 감퇴했다. 사실 이러한 잘못 역시 가짜 뉴스가 다시 나타나기에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부분적으로라도 기여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가짜 뉴스

‘가짜 뉴스’란 무엇일까? 단지 거짓인 보도를 한다고 해서 가짜 뉴스는 아니다. 의도적인 거짓을 보도해야 가짜 뉴스다.

 

2016년 미국의 대선 기간이 시작될 무렵에는 ‘조회 수’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조회 수를 올릴 때마다 주머니에 몇 센트씩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가짜 뉴스 사이트들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게시해 사람들이 클릭을 하도록 유도했다.

 

몇몇 가짜 뉴스 생산자들이 힐러리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쓸 때보다 트럼프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쓰거나 힐러리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쓸 때 조회 수가 더 높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당연히 그들이 어디에 집중했겠는가?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가짜 뉴스는 단순한 ‘낚시 기사’에서 ‘정보 공작’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다시 말해 금전적인 이익을 얻으려는 수단에서 정치적인 술책으로까지 변모했다.

 

힐러리를 비난하는 가짜 뉴스가 만들어지도록 금전적인 유인(혹은 아이디어) 제공한 배후 가운데 정치적인 세력이 없다고 확신할 있을까? 가짜 뉴스의 생산자들은 오직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하지만 돈으로 그들을 사주한 자들은 누구였을까? 사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웹사이트 100 이상이 마케도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우연의 일치이며 이면에 아무런 정치적인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야 할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대선 기간에 활동한 가짜 뉴스 생산자들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가지고 있지 않았든 그들의 행동이 정치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가짜 뉴스는 2016년 대선 당시만 하더라도 클릭 횟수를 높이려는 매스컴의 욕심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인 공격 수단으로 탈바꿈했다. 결국 ‘가짜 뉴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든 이익을 위해서든 영향력을 위해서든 고의적으로 허위 정보를 생산하고 유포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동기가 무엇이든 결과는 치명적일 수 있다.

 

혼란과 혼돈의 세계로

가짜 뉴스는 ‘의도적’으로 거짓 보도를 하는 뉴스를 가리킨다. ‘거짓말’과 비슷하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가짜 뉴스’는 ‘프로파간다’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프로파간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Propaganda Works》의 저자 제이슨 스탠리Jason Stanley는 이러한 관점에 반박하면서 프로파간다를 편향된 혹은 속이는 의사전달 방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프로파간다에 반드시 진실이 아닌 정보를 믿게 만드는 과정이 포함될 필요는 없다. 또한 프로파간다가 반드시 가식적인 주장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스탠리는 프로파간다를 ‘문제가 있는 이념을 활용하고 강화하는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프로파간다의 목표는 그저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것, 충성도를 높이는 것,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팀을 선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이미 여러 고전적인 프로파간다 수법(감정 고무하기, 비평가 폄하하기, 희생양 만들기, 분열 조장하기, 정보 날조하기) 사용하고 있는 만큼, 스탠리는 우리가 권위주의 체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경고. 프로파간다의 목적은 자신의 말이 옳다고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가 진실보다 위에 있다고 선언하는 이다. 정말로 강력한 정치 지도자는 현실마저 거역할 있는 이다.

 

스탠리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참고해 이렇게 말한다. “대중을 확신시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꾸며낸 사실도 아니다. 대중을 확신시키는 것은 노골적인 무시다.” 비슷한 주제에 대해 아렌트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전체주의 지배가 노리는 가장 이상적인 대상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혹은 참과 거짓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이다.”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파간다는 조종당하고 있는 사람이 자유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

 

어차피 진실이 온갖 헛소리 밑에 파묻혀 있는데 굳이 진실을 검열할 필요가 있을까? 정확히 이 지점이 탈진실 현상의 핵심이다. 진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황,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상황 말이다.

 

스나이더는 우리가 어떤 길목에 서 있는지 잊지 말라고, 가짜 뉴스나 대안적 사실과 같은 술책이 언제든 우리를 권위주의 체제를 향해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스나이더는 “탈진실은 파시즘의 전조pre-fascism나 다름없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가 어떤 선동가가 꿈꾸던 것보다도 빠른 속도로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가능성을 적어도 경계는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가짜 뉴스가 오로지 돈만을 노리고 만들어졌다면 그때는 단지 사기에 가까울 것이다. 혹시 거짓을 믿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온전한 의미에서 프로파간다는 아니다. 제이슨 스탠리가 지적하듯이 프로파간다의 목적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력을 확고히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속임수가 효과적인 도구는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부는 아니다. 진정한 폭군은 애초에 우리의 동의를 바라지도 않는다. 탈진실이 정말로 파시즘의 전조에 해당한다면, 가짜 뉴스는 대중을 본격적으로 억압하기 전에 경계심을 푸는 용도로 사용하는 초기 전략일지도 모른다. 가짜 뉴스는 우리를 혼란시키고 모든 출처를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폭군은 이를 이용하려들 것이다. 진정한 프로파간다는 나중에 우리의 믿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누가 진실을 결정하는지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에야 나타날지도 모른다.

 

가짜 뉴스에 맞서 싸우려면

‘기계적 중립성은 속이려는 자들이 원하는 바’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혹시 우리가 양비론에 빠진다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를 바라는 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

 

첫째, 시스템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해당 문제가 어떤 식으로 이용될 수 있는지 이해하자. 페이스북과 구글은 현재 미국에서 발생하는 온라인 광고 수익의 85퍼센트를 가져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페이스북과 구글이 가짜 뉴스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리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팩트체크 사이트 ‘스놉스’의 편집장 브루크 빈코우스키Brooke Binkowski 이렇게 말한다. “정답은 가짜 뉴스를 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훨씬 많은 진짜 뉴스로 가짜 뉴스를 덮어버리는 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계속 정보를 찾을 것이며, 검증된 정보, 자세한 정보, 상황에 맞는 정보, 깊이가 있는 정보를 발견할 것이다. 합리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정도로는 확증 편향에 빠질 정도로 당파심이 깊은 사람까지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짜 뉴스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도 결국 양적으로 넘쳐흘렀기 때문 아니었나? 따라서 탐사 보도 기관이 출처가 믿을 만하고 사실 검증이 이루어졌으며 증거가 기반이 되는 보도를 진행할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해결책이 있다. 디지털 신문을 1개월에 10회로 제한되는 무료 기사만 것이 아니라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의 구독 신청 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둘째, 비판적 사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자.

대니얼 레비틴Daniel Levitin이 집필한 《무기화된 거짓말Weaponized Lies》이 훌륭한 교재가 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수치 자료를 읽는 법,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법, 올바로 추론하는 법 등 비판적 사고에 도움이 되는 온갖 기술들을 배울 수 있다.

 

가짜 뉴스 식별 방법

1. 저작권을 확인하라.

2. 여러 출처를 통해 확인하라.

3. 출처의 신뢰성을 평가하라(예컨대, 충분히 오래 인정받았는지 확인하라).

4. 정보의 게시 일자를 확인하라.

5. 주제에 대한 지은이의 전문성을 평가하라.

6.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라.

7. 현실성 있는 내용인지 의심하라.

 

가짜 뉴스가 탈진실에 미친 영향

가짜 뉴스 문제는 탈진실 현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실, 둘을 동일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핵무기가 존재한다고 해서 무조건 세계가 멸망하지는 않는 것처럼 가짜 뉴스가 곧바로 탈진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핵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만큼 어리석지만 않으면 된다.

 

소셜미디어는 탈진실 현상을 부추기는 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도 결국 도구일 뿐 그 자체로 결과는 아니다.

 

우리는 정보 통신 기술을 가지고 거짓을 퍼뜨릴 수도 있지만 진실을 퍼뜨릴 수도 있다. 진실이 싸움에 뛰어들 만큼 가치 있는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진실을 위해 싸우도록 하자. 우리가 가진 도구가 위험한 무기로 이용당하고 있다면 다시 그 도구를 되찾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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