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독서노트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 트루스] (6)

Place-B 2022. 8. 8.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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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탈진실로 이어졌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접근법이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

 

‘객관적인 진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번째 논지라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 생각이 옳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참인 말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번째 논지가 등장한다. 누군가 어떤 진실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은 사람의 ‘정치적 이념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셀 푸코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언어에 의해 규정되지만 언어 자체는 권력과 지배 논리로 가득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지식을 주장하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힘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힘없는 자들에게 강요하는 전략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진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하는 말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실을 알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힘을 가진 자만이 무엇이 진실인지 결정할 있을 이다.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행위는 파시즘과 다를 없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직접적으로 보수 진영의 이념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오늘날의 탈진실 세계에 기여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 특유의 모호함 속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다가 자신들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목적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빌려다 쓰는 보수주의자들은 사상에 담겨 있는 세세한 내용 따위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일단 도구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과도를 가지고도 망치처럼 쓸 사람들이다. 실제로 30년 전만 하더라도 보수주의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보 진영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오용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학자들 역시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사실이 존재해야 현실을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약화시켰으며 그 결과 어떤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이나 객관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서 부당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철학의 역사는 객관적인 진실에 대한 논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이나 객관성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도를 넘는 행동이다.

 

과학 전쟁

물리학자, 화학자, 생물학자 등 자연과학자들(경험적인 증거에 비추어 이론을 테스트함으로써 세계의 진리를 탐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를 주장하는 학자들(과학 이론은 물론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며 따라서 객관적인 진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 당연히 거대한 충돌이 있었다.

 

사회구성주의 운동 역시 포스트모더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문학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꿔놓은 것처럼 사회구성주의는 과학 지식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꿔놓으려고 했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사실에 단 하나의 검증된 관점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뒤흔들고자 했다.

 

당시 일반적인 사회과학자들은 과학 이론이 실패한다면 그 이유는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념적인 편견이 개입해 충실히 증거에 고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과학지식사회학의 ‘스트롱 프로그램’에서는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이론이 ‘이념’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과학자들이 특정한 이론을 다른 이론보다 선호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이론을 제시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부 사상가들은 과학의 역할이 실증적인 분야의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개인적인 지위를 확대시켜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이 자연 세계의 진리를 밝혀내기보다는 정치적 신념에 따라 권력과 지배 논리를 강화하는 데에 더 관심이 많다는 뜻이었다.

 

소칼의 지적 사기극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과학 전쟁은 그로스와 레빗이 지적한 대로 개념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문제였지만, 진보주의의 평판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도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진보주의는 늘 과학과 이성의 편에 서서 미신과 무지에 맞서 싸워왔다. 하지만 오늘날 인문주의자들은 증거에 기반을 둔 생각을 근본부터 뒤흔듦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썼던 자신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현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은 에이즈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찾거나 지구온난화를 예방하는 전략을 세우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면 역사, 사회, 경제, 정치 영역에서 잘못된 생각에 맞서 싸우지도 못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바깥으로 표출된 이상 다시 집어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부끄러운 시간도 잠시, 소동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을 사람들이 흥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넓은 지명도를 얻게 된 것이다. 이처럼 뒤늦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보수주의자들도 있었다.

 

보수 진영의 포스트모더니즘

진화론과 같은 과학적인 주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과학 이론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약화시키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용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오늘날 ‘보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진실, 객관성, 권위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모든 사실 주장이 정치적 의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보수 진영만의 포스트모더니즘 논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보수 진영이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증거에 기반을 둔 모든 종류의 사실을 공격하기 위해 진보 진영에서 개발한 도구를 활용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탈진실의 또 다른 근원이 마련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인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이 확립되는 과정 이면에 작용하는 미신과 정치를 까발리는 것은 진보 진영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전술이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에 보수 지지자들이 한층 대담해지면서 지구온난화와 같은 과학적 사실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보수 정치인들의 의무로 떠올랐기 때문에 정치적 사조가 뒤바뀌었다. 워너는 “과학을 공격하는 것이 이제 급진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여흥거리가 되었다.”라고 결론짓는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이 기후변화 논쟁 직전에 치렀던 전투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기후변화 논쟁에서 사용한 무기는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바로 ‘진화론’에 대한 논쟁이었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이 창조론을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 이론으로 둔갑시키고 창조 대 진화 논쟁을 공립학교 생물 수업에 포함시키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는 데에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째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지적 설계론은 물론 지적 설계론의 대부인 필립 존슨Phillip Johnson 자신이 그렇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 로버트 페녹Robert Pennock은 한 학술 기사를 통해 이렇게 밝힌다. “지적 설계를 주창하는 핵심 인사들의 글과 인터뷰에 드러나듯이, 지적 설계 논증 깊숙한 곳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맥락이 흐르고 있다. 사실 페녹은 “지적 설계론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나 마찬가지”라고 노골적으로 지적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지적 설계론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해 보인다. 한편,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기후변화 반대론자들은 지적 설계론을 참고해 과학에 맞서 싸우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기존의 과학 지식을 공격하자. 자신만의 전문가를 찾아 지원하자. 해당 문제가 논란이 많다고 밀어붙이자. 언론과 로비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노출시키자. 대중의 반응을 지켜보자.” 보수 진영 정치인들과 그 밖의 과학부인주의자들이 데리다나 푸코를 직접 공부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학이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 이념에 어긋나는 과학적 사실을 공격할 때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과 동일한 논리와 기법을 사용한다.”라고 주장하더라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게 주장할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선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고백에 주의를 기울일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놓은 아이디어가 보수 진영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거에 나 역시 과학적 사실이 구조상 필연적으로 ‘확실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나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주된 이슈였다. 물론 나는 이미 마무리된 논의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해 대중을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속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을까? 어쨌든 나는 바로 그 잘못 때문에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내 의도가 ‘어떤 사실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성급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키려던 것’이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어리석은 착각은 아니었을까? 상황이 너무 빨리 변했던 것일까?

 

박사 과정에 있는 순진한 미국 학생들은 아직도 진리는 지어내는 것이라는 점, 간섭이나 편견 없이 자연스럽게 진실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점, 우리는 늘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점, 우리는 특정한 입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배우고 있다. 바로 그 동일한 사회구성주의 논리를 사용해 위험한 극단주의자들이 우리가 힘들게 얻어낸 사실, 우리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실마저 파괴하려고 하는데도 말이다.

 

전문가 집단은 물론 자신이 대중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는 온갖 높으신 양반들에 대한 불신이 담겨 있던 전형적인 진보 진영 논리가 이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과학 연구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강력한 도구로서 이용당하고 있다.

 

정말로 ‘진실’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해석’만 존재한다면, 그리고 미국인 수백만 명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누가 굳이 애를 써가며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려고 할까? 추운 기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거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도 그러한 해석에 동의한다면, 기후변화는 실제로도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주관적인 경험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기록적인 인파가 참석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실제로도 기록적인 인파가 참석한 것이 된다.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항공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불러일으킨 본래 목적은 권위를 가진 자들의 착취로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기후변화로 가장 고통받는 부류가 바로 그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다.

 

더 이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데 진보 진영이 무슨 수로 보수 진영의 이념에 맞서 싸운다는 말인가? 아무 영향도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온갖 개념들을 가지고 장난을 벌인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학계 내에서 진실 개념을 공격할 때만 하더라도 그저 흥미로운 놀이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놀이 기술이 학계 밖으로 나와 과학부인주의자들, 음모론자들, 자기 직감을 어떤 증거보다 신뢰하는 방어적인 정치인들의 손에 쥐어지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진보 진영은 어느 쪽일까? 진실을 믿을까 아니면 믿지 않을까? 아마 적들에게 도움이나 위안을 제공하는 편과 진실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옹호하는 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수 진영의 과학부인주의에서 현실을 구부리는 탈진실적 회의주의로 발전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철학은 진실과 사실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면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어쩌면 이제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위험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철학적 견해는 때때로 실제 현실에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이 저지른 일은 정말 악랄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들 때문에 진실과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가 남부끄럽지 않은 일로 여겨지는 지적 풍조가 생겨났다. 이제 주위에서 이런 말이 들려올 것이다. “아직도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부류가 있다던데 그쪽 분이신가 보네요.

 

트럼프를 지지하는 인터넷 괴물들

탈진실의 출현을 이해하려면 결코 ‘대안 미디어’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브라이트바트 뉴스Breitbart News’나 ‘인포워스’와 같은 대안 뉴스 창구가 없었다면, 트럼프는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오늘날 뉴스가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실’을 한두 개 언론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꼭 ‘언론’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대선 기간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움직임은 상당 부분 대안 우파 블로그에서 나왔다.

 

오로지 관점만 존재할 뿐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가능할까? 주류 언론에서 나오는 뉴스를 의심하거나 음모론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뉴스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치적 이념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뉴스를 지어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제시하는 사실이 우위에 있어야 할까? 누구의 관점이 옳은 관점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은 분명 탈진실의 후견인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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