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탈진실에 맞서 싸우다
거짓에 맞서 싸워라
내게 중요한 문제는 진실이 하찮게 여겨지는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실 개념을 옹호하면서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거짓말에는 언제나 맞서 싸워야 한다. 어떤 주장이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그 말을 믿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탈진실 시대에는 당파적인 힘이 개입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정보의 출처가 파편화되어 있어서 누구든 의도적 합리화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짓말에 맞서야 하는 이유는 거짓말쟁이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거짓말쟁이는 이미 자신의 검은 속내에 너무나 깊이 빠져서 갱생의 여지가 없을 수 있다. 그보다 우리는 모든 거짓말에 관객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거짓말과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거짓말에 맞서지 않는다면, 단지 무지한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의도적 인식 회피 단계를 지나 본격적인 부인주의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어떠한 사실이나 증거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거짓말을 마주하면 거짓말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탈진실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어떠한 거짓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거짓이 내는 목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진실’은 우리에게 맞서 싸울 힘을 준다. 당파적인 주장이 끝없이 이어지고 회의론이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진실’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차피 탈진실 시대를 살고 있다면 미디어가 방침을 어떤 식으로 바꾸든 딱히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이미 인지 편향과 정치적 이념에 따라 확고히 결정되었다면 무슨 수로 신념을 바꿀 수 있을까? 혹시 그냥 채널을 돌리면 안 될까?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의도적 합리화나 인지 편향 같은 것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기는 하지만, 진실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결국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당파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상충되는 증거를 거부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역화 효과’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에 한계는 없는 것일까?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무한정 [증거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무한정 거부한다는 것은 광범위한 반대 증거들에 직면하고서도 의도적 합리화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티핑포인트가 실제로 존재한다’.
잘못된 신념이 꽤 완강할 수는 있지만 사실 정보를 가지고 ‘강력한 충격’을 반복적으로 제공한다면 신념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언젠가 진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간, 우리는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의 잘못된 신념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설령 당신이 기후변화에 관한 사실들을 부정하려고 애쓰더라도 눈앞에서 사실들이 증명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물이 거주지 위로 혹은 사업장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면 사람들은 사실을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비판적인 사고를 거들고 탐사 보도를 지원할 수 있다. 우리는 거짓말쟁이들에게 소리칠 수 있다. 물이 차오르기 전에 우리는 진실을 가지고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전략을 사용할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느낄수록 듣는 내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도표 형태로 제공되는 정보가 이야기 형태로 제공되는 정보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즉,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을 설득하고 싶다면 소리를 지르는 대신 조용히 도표를 하나 건네주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특히 상대편이 어리석거나 완고하게 행동한다고 느끼는 경우, 정치색을 완전히 뺀 채로 사실 관계를 묻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럴 때는 우리 역시 똑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또 있다.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탈진실적인 경향성을 물리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우리 모두는 탈진실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인지 편향을 타고난다. 따라서 탈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를 초래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외면하려고 하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도 그러한 진실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차피 우리가 모든 사실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마음속 목소리가 속삭이더라도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비판적 사고를 방해하는 한 가지 요인은 ‘확증 편향’이라는 한 가지 물줄기만을 따라 헤엄치는 것이다. 정보를 주로 한 가지 출처를 통해서만 얻고 있다면 혹은 특정한 채널 하나에만 정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 출처를 다양화시켜야만 한다.
그렇다고 가짜 뉴스까지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혹은 폭스뉴스와 CNN 사이에서 일종의 기계적 중립성을 유지해도 괜찮다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는 뉴스 출처를 올바로 검증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신이 접한 뉴스가 가짜 뉴스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라는 뜻이다. 단지 뉴스를 접하고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에 가짜 뉴스라고 취급하는 것인가?
특히 뉴스에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내용이 나오는 경우 더욱 의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실증적인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경우 가장 중요한 기준은 결국 ‘증거’다.
“누구나 자신만의 의견을 가질 권리는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사실은 가질 수 없다.” 과학은 경험적인 증거에 비추어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태도를 갖추도록 도와준다. 또한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됨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고쳐나가는 태도를 갖추도록 도와준다. 과학 외에 다른 사실 문제를 고려할 때에도 이러한 태도를 숙지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겠는가? 그러지 못하겠다면 안타깝지만, 탈진실보다 훨씬 더 위험한 무언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선진실 시대에 들어서고 있을까?
트럼프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웬만하면 제 직감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제 직감이 옳더군요.” 그가 말한 내용 중에는 애초에 증거를 가지고 증명할 수가 없는 내용도 존재하지만 어쨌든 그조차 ‘진실’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한 말을 진실이라고 믿었더니 정말로 진실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자기 예측이 맞아떨어졌다고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신이 현실을 바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마커스는 이렇게 평한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떻게든 그 말을 진실로 만들거나 적어도 그 말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도대체 이 현상을 탈진실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라고 불러야 할지 궁금해진다. 과연 이 현상이 ‘경험적인 믿음을 형성하는 데에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황’에 불과할까? 아니면 그보다는 자기기만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할까? 마커스는 이에 대해 ‘선진실pre-truth’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트럼프가 사실이 발생하기도 전에 자신이 그 사실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 그 사실이 일어나도록 만들 수 있다고도 확신하는 상황을 담아내고 있다. ‘선진실’ 개념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증거가 아니라 미래(혹은 과거)를 직관할 수 있다거나 심지어 통제할 수 있다고까지 느끼는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마술적 사고magical thinking’라고 부른다.
탈진실이든 선진실이든, 진실을 무시하는 태도는 정말로 위험하다. 바로 이것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탈진실 현상은 우리가 ‘사실’과 ‘진실’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의견’과 ‘감정’이 영향을 미치도록 허락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가 현실 자체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을 감수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분명 다른 길도 존재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방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선진실은 물론 탈진실도 극복할 수 있다. 탈진실 현상은 현실 자체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현실에 반응하는 방식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지 편향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인지 편향을 밟고 올라가 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우리가 더 나은 뉴스 미디어를 원한다면 제대로 된 뉴스 미디어를 지원하면 된다. 오늘날 세상에서 누군가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결국 세상에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진실은 지금까지 늘 소중했고 앞으로도 계속 소중할 것이다. 제때에 이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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